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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나이 학력 고향, 군대 및 걸어온길 정리

by 행복한플라비 2019.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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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알아볼 인물은 김어준입니다.

그는 68년생으로 올해 51세로 고향은 경남 진해입니다. 홍익대 전기제어공학 출신이지요

군대는 상근 방위병 출신입니다.

울나라의 진보 성향 뉴스인, 인터뷰어. 딴지일보 종신총수. 초기 조선일보에 대한 미러링으로써 황색뉴스를 표방하는 인터넷 미디어 딴지일보를 창립하였으며 이후 조중동이나 기타 뉴스에선 밝히지 않는, 정권이 불편해 하는 보도에 대핸서 심층 취재하였습니다.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의 대중적 관심으로 울나라 팟캐스트 붐의 시초로 여겨집니다.



2011년 나는 꼼수다 이후 부침이 있었지만 2016년 김어준의 보도공장으로 컴백해 다시 지상팀 뉴스인으로 올라오면서 기존 기성 뉴스 매체 출신이 아닌 뉴스인으로서 성장해 시사저널의 연간 리서치, '누군가 울나라를 움직이는가' 의 2017년 영향력 있는 뉴스인 부문에선 손석희 JTBC 대표이사 사장 에 이어 2위에 오를 정도로 거물급 뉴스인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러한 많은 영향력으로 인한 각양여러 진척 이슈 연관 논란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남 진해시 출신입니다. 어머니의 직업이 유치원 교사였으며 굉장한 방임주의 가정에선 자랐다고 합니다. 이 방임주의란 것이 어느 정도였냐면 김어준이 고교생 시절 담배를 피울 것인지 말 것인지가 아니라 집에선 대놓고 피울 것인지 밖에 




나가서 피우고 들어올 것인지를 두고 부모님과 설전을 벌였습니다고 합니다. 이때 김어준은 난생 처음으로 부모의 간섭을 받았습니다고 하는데요, 끝끝내 방에선 담배를 피우겠다는 김어준의 고집에 어머니는 뺨을 한 대 때리고는 "그래 피워라 인마"라고 반응했습니다네요고 합니다.



지금 외모와 다르게 정소년기까지 많은 키에 날씬한 체형이라 여자들에겐 관심이 많았습니다고 하는데요, 나꼼수를 할 때 정봉주가 김어준의 옛날 지인을 만나서 조사해서 방영에선 얘기간 적이 있는데요, 유년기에 미국에 가서 10년간 살다가 중학교를 다니던 중에 울나라에 돌아왔다고 하는데요, 중학생 때 이미 키가 180에 가까운 훤칠한 외모에 얼굴이 잘생긴 데다가 공부를 잘해서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고 합니다. 미국에선 울나라 중학교로 전학오자마자 처음으로 본 학교 테스트[중간고사 혹시나는 기말고사]에선 전교 1등을 하는 바람에 '얼마 전에 전학온 키 크고 잘생긴 애가 공부도 잘 합니다'고 소문이 나서 별명이 테리우스가 되어버렸네요고 합니다.



고등학교 당시 우등생이었으며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 싶어 삼수까지 했으나 송두리째 실패하고, 결국 홍익대학교 전기제어공학과로 진학하였습니다. 스스로 회술한 바에 따르면 더 재수해서 서울대를 가고 싶었으나 군대 때문에 홍익대에 머물렀습니다고 합니다. 훗날 자신의 저서 '건투를 빈다[p.26~29]'에선 서울대에 갔더라면 세상의 수많은 가치 중 단 공부 하나 잘하는 걸 가지고 스스로 실재 자체가 우월하다고 믿는 어린 편협하고 유치한 멘탈리티에 사로잡혔을 것이라며 '서울대에 떨어진 것이 다행입니다'라고 했습니다네요. 중학교 시절 사진과 시. 이때 계속 서울대 입시에 떨어져서 하루는 집에선 화장실에선 문 잠그고 울고 있는데 어머니는 시크하게[문짝을 부수고 들어와] "니가 대학 떨어졌습니다고 내가 하루라도 뭐라 그런 적 있냐"고 "그만 울고 얼른 튀어나와서 밥 방법으니까 빨리 먹으라"고 핀잔을 줬다고 합니다. 병역은 지금의 상근에 해당하는 방위로 필하였습니다.




대학생 시절에는 아직까지는 운동권의 영향력이 꽤 남아있던 시절임에도 학생운동에는 별 집중이 없던 것인지 그냥 저냥 평범한[?] 대학생활을 지냈습니다. 졸업 후 포스코에 입사했으며, 대학생활 중 흔히 말하는 사고를 친 적도 없고 그렇습니다고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것도 아닌 평범한 모습을 견지했습니다네요. 하지만 이 대학 시절 배낭여행을 대단히 많이 했으며, 근 50여 개국 이상에 나라를 여행하면서 많은 경험과 견문을 넓혔습니다고 스스로 자술합니다.



배낭여행 중의 자금은 송두리째 현지조달. 비행기티켓도 여행사에다가 홍보용 사진촬영과 리뷰를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구하였습니다. 추억에 따르면 팀리-로마에선 생활하는 동안에는 호텔 '삐끼'로 시작하여 매니저도 지내는 등 비즈니스 수완이 좋았습니다고 합니다. 귀국 당시 그렇게 수중에 모인 6천 만원을 들고 딴지일보 발간에 노력하였습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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